오늘 생리통 최악이었다. 자연을 보겠노라 들어온 이 시골 마을에선, 결국 4박 5일간 별달리 한 것 없이 떠나게 생겼다. 오늘 아침에 진통제를 먹고 약발이 돌기를 기다리면서 침대에 엎드려 있다가, 이 고통이 내 ‘존재’에 따른, 오직 혼자 감수해야 하는 감각임에 화가 솟구쳤다. 이 통증에서 조금 멀어지기 위해 작동한 본능은 별다른 게 아니었다. 거의 일 초에 세 가지의 잡념이 산발적으로 그러나 분명하게 피어올랐다. 매트리스를 손톱으로 벅벅 긁는 동안 떠오른 생각은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었다. 출산의 고통은 어떨까 난 몇의 자녀를 갖는 게 좋으려나 임신하면 생리를 열 달은 안 하네. 헉 출산은 그럼 단지 연기에 따라 축적된 고통의 폭발이 아닌가. 불교의 업보가 이런 개념이기도 하려나. 생리는 업보인가.
내가 지금 묵고 있는 이곳 신트라는 ‘공포’의 장소로 기억되리란 예감이 든다. 서술어는 분명치 않다. 공포가 (갑자기) 생긴 건지, (원래 있었는데) 드러난 건지, (잠깐) 나타난 건지 모른다. 포르투에서 버스를 네 시간 타고 신트라로 내려온 날이었다. (이동하는 날 보통 그래왔듯) 비바람이 불었고 먼저 근처 레스토랑에 가서 배를 채운 뒤에 숙소로 가기 위한 버스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근데 내가 기다리는 버스가 도통 오질 않았다. 구글맵에 따르면 버스 두 대가 이미 나를 지나쳤어야 했는데 1523 버스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한 시간 쯤 기다렸을까 해는 완전히 지고 깜깜해져 있었다. 정류장에서 숙소까진 걸어서 38분 거리였다. 이쯤이야 뭐 걷지 싶었다.
도로에 간신히 나 있는 인도로 진입하면서 이상함을 느꼈다. 숲길에 나 있는 차 전용도로 같은 길이었다. 인도는 중간 중간 끊겨 있었고 지나가는 다른 사람은 없었다. 간간히 지나가는 차들의 속력은 아주 빨랐으며 내 옆의 숲은 서늘할 정도로 울창했다. 내 폰엔 우버가 깔려 있지 않았고 난 그 길에 멈춰 있기가 더 무서웠다. 일분 일초라도 빨리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어 모든 짐을 들고 거의 내달리듯 전진했다. 입으론 ‘괜찮아 앞으로’ 중얼거리면서도 정말이지 울고 싶었다.
슬슬 무서워지는 수준이 아니었다. 난 완전히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코너를 도는 차가 미처 나를 보지 못하고 쳐버릴 수도 있었고, 인적이 드문 그 도로에선 납치유괴폭행강간살인유기 당할 가능성도 비교적 높았다. 그도 아니면 반대편의 숲에서 튀어나오는 위험의 수만가지 시나리오까지. 이십 분 간 그 도로를 걸으면서 미쳐 버리는 줄 알았다. 당시 경험한 짙은 공포가 며칠이 지나도록 여운을 남기고 있다.
신트라에서 느낀 또 다른 종류의 공포는 포르투에서 끌려온 것이다. 이곳은 한적한 시골 마을이라 주민들 뿐만 아니라 관광객들도 많이들 차를 타고 다니는 듯하다. 어딜 가든 정차해 있는 차가 자주 보이는 마을이란 말이다.
포르투 숙소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저녁 7시 쯤이었고 차는 많이 지나다녔으나 걸어다니는 사람은 드물었다. 정차해 있는 차 하나를 지나치며 무심결에 유리창을 보는데 아랍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조수석 유리창으로까지 고개를 돌려가며 그 큰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하나. 신트라에서 안개가 멋드러지게 낀 날 산 속에서 정차한 차를 정면으로 마주치고 팔의 솜털까지 솟아오르는 게 느껴질만치 소름 끼쳤다.
지금 정말 쓰고 싶은 건 공포스런 순간들의 나열이 아니다. 내가 글로 남기려는 건 신트라에서의 마지막날인 오늘, 이 모든 것들의 퍼즐이 맞춰지듯 원초적으로 느낀 ‘모든 감각은 개인적이다’ 라는 사실이다. 여기에서의 큰 테마가 공포였음에도 진정 행복했던 순간은 있었다. 고양이 개 말 작은 새까지. 동물들을 자주 마주쳤기 때문이다. 지금 숙소에만 고양이 네 마리가 함께 살고, 산책하면서는 이웃 정비소의 늙은 말티즈, 주인 없이 혼자 다니는 사교성 좋은 대형견과도 놀았다. 한 성에서는 영험해보이는 고양이도 마주쳤다. 그중 손길을 수락한 몇을 쓰다듬었는데, 그때 느낀 다른 생명체의 촉감이란 정말 부드럽고 따뜻했다.
이 촉각을 두고 감각 전반을 떠올린다. 내가 생명체의 형태로 존재하기에 감각은 내게 전유된다. 먹는 것, 맡는 것, 칼에 찔리는 것 모두 개별 사건 속에서 당사자에게만 경험된다. 다른 생명체를 쓰다듬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만지는 쪽에게는 무언가를 지나치는 손바닥의 부드러운 감각이, 만져지는 쪽은 몸의 넓은 부위가 쓸어져 내려가는 감각이 개인적 체험으로서 경험된다.
오늘 아침 생리통이 내게 한정된 고통이라는 점이 너무 원망스러웠다고 위에 썼다. 또 납치유괴폭행강간살인유기. 이렇게 무서운 일들이 내 몸에 자행될 수 있다는 점도 이 도시에서 내내 두려워했다고 적었다. 이런 생각들이 계속되다 보니 내가 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성가시고 공포심을 자아내는 원흉처럼 느껴졌다. 말 그대로 내가 촉각적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생명체’라는 게 그토록 무섭고 싫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다양한 감각에 따라 쾌와 불쾌도 함께 느껴질 수 있다. 대부분의 감각에 있어서는 쾌의 이점이 압도적인 동시에 일상 생활에도 유익하므로 나는 늙어서까지 각각의 감각 기관들이 어느 정도 잘 작동하길 바란다. 반면 고통과 연관되는 촉각에선 (적어도 이 도시에서) 그런 바람이랄 게 전혀 없었다. 불쾌의 가능성에 대한, 증폭된 두려움이 사랑하는 사람을 안는 등의 촉각적 경험마저 삼켜버린 것이다. 존재에 대한 부정은 지나친 두려움에서 시작되었구나, 그 사실을 동물들을 쓰다듬으면서 깨달았다.
내일 아침 이곳을 떠난다. 이제 내가 가는 어느 곳에도 위험이 도사린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것에 따른 감각은 육체를 가진, 이 육체로 다양한 쾌와 불쾌를 경험해온 사람으로서 응당 자연스럽게, 혼자서 경험되어야 하는 것임을 안다. 받아들이고 나면, 지레 겁먹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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