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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2023년 5월 23일

by 홍지우 2024. 11. 17.
4월 3일

의지로 버티던 며칠간 밤마다 괴로웠다. 전담이 집에 있었을 땐 그걸 한 손에 들고 몇 십분간 쳐다보고 있었다. 물건들을 효영언니에게 들려보낸 후엔 도저히 안되겠어서 연초 사러 나간 게 한 번, 외투를 입고 벗은 게 며칠. 결국 토요일 오전 기상하자마자 병원에 갔다. 금연약(니코챔스)을 타와서 지금 이주 째 먹고 있다.

약 부작용 중 꿈이 과도하게 생생해진다는 항목이 있었다. 나도 비켜가진 못했다. 요즘 재미난 꿈을 하룻밤에도 몇 차례씩 꾼다. 여러 지인들이 꿈에 번갈아 나오는가 하면 어떤 날은 연초를 우걱우걱 씹고 뱉다가 깼다.

효영 언니가 그날 집까지 걸어 오면서 담배를 끊고 싶은 이유를 묻기에 손가락 접어가며 나열했더니 7개는 족히 넘었다. 말하다 중간에 아이스크림 사먹으러 마트에 들르느라 몇 개는 까먹었다. 이참에 한 번 정리해볼까 싶다.

1. 중독을 제어하지 못한다는 패배감을 종종 느낌
2. 집에서 몰래 필 때 현타
3. 언젠가 부모님이 알게 되면 내게 불이익이 있을 거임(잔소리+경제적인 제한 등)
4. 부모님 마음 상하게 하는 불효자가 되기 싫었음
5. 몸이 니코틴에 예민해서 베이핑 몇 번에 마약한 것 같은 뽕이 있었음. 그런 어지러운 느낌을 즐기기도 했지만 이거 위험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 건 계단 내려다가가 굴러 넘어질 뻔했을 때부터임.
6. 또 뽕이 있을 때마다 무기력이 극심해짐. 집에서 하릴없이 담배 물고 있다 보면 다른 거 아무 것도 필요 없고 이것만 있음 될 것 같단 (20대 초반에게 위험한) 생각을 하게 됨. 이게 내 미래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7. 아빠가 반 년째 (힘들게) 금연을 하고 있음. 이거 더 오래 하다간 나중에 끊고 싶거나 끊어야 할 때 나도 저렇게 힘들어 할 것 같아서 하루 빨리 끊어야겠다 싶었음
8. 식욕 수면욕 성욕 다양한 욕구들에 지배 당하고 있다는 게 안 그래도 귀찮은데 흡연욕까지 더해지니 성가시기 짝이 없음
9. 오히려 흡연자에게 더 많은 자제력이 필요함. 가끔 과도하게 하는 시기가 있는데 그럴 땐 아침마다 목이 아픔. +무기력 때문에 일상생활이 어려워짐. 이거 잘 못 됐다를 깨닫고 그 양을 줄이려고 하면 결국 필요한 게 자제력. 평소에 이렇게 잔잔바리로 자제력을 발휘해야 하는 상황이 싫음
10. 상태 안 좋을 때 담배 물고 있다보면 상태가 더 안 좋아짐. 앞으로도 상태 안 좋을 땐 종종 있을 텐데 그때마다 이렇게 지하로 뚫고 내려가다 보면 엔딩이 좋지 않을 것 같았음
11. 처음 시작한 건 담배 피우는 사람들이 멋지다고 생각하는 내가 짜증나서였음. 그닥 멋지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 사람도 흡연자라는 걸 알게 되면 무의식적으로 호감도가 10 정도 올라갔음. 이런 게 애같고 싫었음. 내가 안 해본 거니까 동경한 감정이 비슷하게 있었던 것 같음(같은 맥락에서 난 내가 못 먹는 양파랑 마늘 잘 먹는 사람도 멋지다고 느낌. 생마늘 우걱우걱 씹는 거 특히 마초스러운). 이제 목적 달성은 되었음. 흡연자라고 멋져 보이지 않음.
12. 언젠가부터 인공적인 액상 맛이 매우 역하게 느껴졌음.
13.

몇 개 더 있었는데 지금 화장실 다녀오고 까먹었다


고딩 때 빡빡이로 민 친구가 있었는데 5년 전 만진 걔 머리 촉감과 비슷해서 향수를 느꼈다

아카라카 날 손님이 별로 없어서 단편 정돈 읽을 수 있었다. 감지덕지


중간고사 기간에 밤 새면서 시험 끝나면 러시아 장편 소설 읽으리라 했는데 막상 손이 잘 안 갔다. 중간과 기말 사이의 공백은 비교적 가벼운 소설과 영화로 채우게 되었다. 최근 본 영화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을 좋아하게 되었다. 홍상수 작품은 서른 편 봤고 여전히 좋다. 얼마 전 수업이 지루해서 특히 좋아하는 작품들을 정리해봤다.

북촌방향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해변의 여인

밤의 해변에서 혼자
우리 선희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쓰면선 이거 너무 많아서 의미가 없는 거 아닌가 생각했는데 모아두고 보니 특징이 보인다. 여성 서사 or (비교적) 군중 서사. 웃긴 거 좋아함





꿈과 꿈에 관한 채팅



그리고 최근에 한 남자가 내 눈 앞에서 칼 갈아서 자해했다. 당시엔 놀랐지만 이후 별 타격 없어서 스스로도 조금 놀랐고 지인들로부터 멘탈이 강한 편이라는 위로 겸 격려를 들었다.





시작은 각자 걸으면서 보는 무엇에 관한 대화였다. Y는 하늘을 보고 걷는 사람이고 나는 땅을 보고 걷는 사람이다. 최근에 읽은 이승우의 <이국에서>에서 하늘과 땅이 순수와 오물로 이어지는, 분명한 은유적 소재로 쓰인 게 기억나서 흥미로웠다. 대활 더 이어갔다.



내 갤러리



Y는 주로 맑거나 흐린 하늘을 보면서 걷는다. 나는 주로 땅의 벌레와 버섯을 관찰하면서 걷는다(가끔 꽃도 본다). 왜? 왜 그렇지? 쿤데라의 불멸에서 본 그림이 떠올랐다. 대출한 책이라 집에 가서 펼쳐볼 수가 없었다. 갤러리를 뒤졌다.

소설 속 인물인 언니 아녜스와 동생 로라를 (소설에 등장하는) 쿤데라가 (또 소설에 등장하는) 친구와 논하는 구절이다. 로라는 꿈으로 가득 찬 머리가 하늘을 쳐다보지만 그의 육체는 땅에 끌리며 큰 엉덩이와 묵직한 젖가슴도 마찬가지로 아래를 바라본다. 아녜스의 육체는 위로 떠오르지만(잘려서 잘 보이진 않지만 남편이 돈 잘 벌고 안정적인 가정을 꾸린 인물이므로 실제 삶의 안정을 얘기하는 것 같음.) 회의로 가득한 머리는 아래를 향한다.

젖가슴 얘기까지 맞아 떨어져 찾아 보고서 폭소했다. 불멸 속 구절이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니라 Y와 내가 정확히 이 반대되는 화살표의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Y도 신기해했고 우린 각자 부여받은 화살표를 뒷받침하는 근거들을 서로 또 스스로 나열할 수 있을 정도까지 계속 생각했다.

-벌레 쓰레기 가난에 관심 많지만 내 몸 누이는 곳이 더러운 건 못 참음. 또 친구가 얘기하기론 내 기본이 안정적이라 몸 자체는 떠오르는 것 같다고.
-아무 데서나 잠 잘 자고 벌레도 두려워하지 않지만 딱히 바닥에 관심을 두진 않고 여러모로 기본적인 태도가 낙관임.

아녜스와 로라는 소설 전반에서 대립하는 이미지로 그려진다. 당장 펼쳐서 비교해볼 수 없는 게 답답하다. 서치해서 나온 한 구절만 첨부


자아의 유일성을 가꾸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덧셈 법과 뺄셈 법이다. 아녜스는 자신의 순수한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자신의 자아에서 외적인 것과 빌려온 것을 모두 추려냈다. (…) 로라의 방법은 정확히 그 반대다. 자신의 자아를 좀 더 잘 보이게 하고, 좀 더 파악하기 쉽게 하고, 좀 더 두텁게 하기 위해서, 그녀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덧붙여 그것에 자신을 동화했다.” (밀란 쿤데라, 불멸, 민음사, 2010년, 164쪽)


이 구절마저 어느 정도 각자에게 해당되는 특징인 것 같아 신기하다(이 구절은 Y와 나누고 ‘본인이 그러함’을 동의받지 못한 구절이기에 확신은 어렵다)
+) 본인 그렇다고 인정하심


이 바닥과 하늘, 아래와 위에는 여러 상징이 더 복잡하게 얽혀 있을 것 같은데, 단순 느낌 뿐 정리되진 않는다. 수기 일기를 쓸 때가 온 거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석촌호수에 가서 조금 걷다가 바닥에 떨어진 신기한 나뭇잎을 봤다. 애벌레일까? 바닥을 보지 못한 Y를 불렀다. 신기해서 사진 찍었다. Y는 보더니 손을 뻗어 나뭇잎을 잡고 옆 나무에 올려주었다. 정말 애벌레인지 허물인지 알 수 없지만 애벌레였다면 그건 생명을 살린 행동이 된다.

난 관찰만 한다. 더러운 것들이 닿는 건 유난스럽게 싫어해 손을 뻗지 않는다. Y는 하늘을 보지만 어쩌다 땅의 쓰레기나 생명을 발견하면 그걸 줍거나 살린다. 평소에도 그런다고 한다. 다만 누군가와 같이 있을 땐 머쓱해 굳이 손을 뻗진 않는다고.





스물 언저리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서 얘와 가벼움과 무거움에 대해 한동안 얘기 나누던 때가 생각났다. 위와 아래 무거움과 가벼움 느림과 빠름 동과 부동. 무궁무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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