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의 성정에 대해 ‘담백하다’는 수식어를 붙일 때 두 가지 해석이 있다고 해보자
a) 남의 비위 맞추는 식의 가식 없음. 페르소나 x. 모든 사람 앞에서 똑같은 모습.
즉, 개인이 맺고 있는 관계들끼리의 비교를 통해 담백-비담백을 판단
b) 1. 과장이나 불필요한 감정 표현을 남발하지 않음, ‘~한 척’이 없는 상태.
2. 계산적이지 않고, 원하는 바나 생각을 돌려 표현하지 않음. 명료한 의사표현.
즉, 개인의 언행이 실제 속내와 얼마간의 괴리감을 가지고 있는가를 중시.
지인이 자신을 ‘담백한 사람’이라 칭하고 내가 그걸 부정하던 저녁에, 내가 전달하고자 했던 건 위에 적은 두 해석의 차이였다. a 신봉자인 지인은 자신이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모습이라 생각하므로 자신이 ‘담백하다’고 말하는 데 어떤 거리낌도 없어 보였다. b 밖에 다른 기준이 있으리라 생각치 못한 나는 가장 담백하지 못한 사람이 그리 말하는 것을 눈앞에 두고 당황스러웠다. 지인은 끝내 내 말을 ‘미사여구 덕지덕지 붙여 이해하질 못하겠다’고 일축하며 대활 끝냈다.
그리고 며칠 전엔 그가 또 의뭉스런 모습으로 내게 품이 꽤 드는 무엇을 강요하기에 화가 났다. b의 기준에 따르자면 평소에도 ‘과장과 꾸밈’으로 니글거리던 사람이 2의 측면(계산적인 모습을 숨기기에 의사전달이 불명료해짐)에서 특히 참아주기 어려울 정도로 느끼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2의 측면은 특히 논리적인 의사 결정을 방해하는 트롤이다.
자신에게 이득이 크게 돌아오는 ‘무엇’이 있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거나 함께 해야 하는 일이라고 해보자. 남에게 돌아갈 이득은 미미하거나 없다. 수직 관계에서 간결한 지시로 처리하면 깔끔할 것이다. 하지만 지인의 경우에는 아래에 적어둘 모종의 이유로 지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근거 몇 가지로 상대를 설득해야 한다.
이 때 지인은 주로 자신에게 유리하고 가장 매력적인 근거를 숨긴 채, 조촐한 이유들을 가지고 설득을 시도한다. 설득력이 반감되는 전략이다. 차라리 숨김없이 모두 오픈하면 너털한 논의 끝에 해당 방향으로 가게 될 가능성이 오히려 클 텐데, (모든 움직임이 제로섬 게임은 아니기 때문에 자신에겐 미미할지라도 상대에게 큰 이득이 생긴다는 걸 알면 기꺼이 행위할 마음이 생길 지 모른다.) 지인은 그 근거가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지 숨기는 편을 고수한다. 그 속에서 상대가 그 필요성을 충분히 납득하지 못해 다른 옵션들을 제시하면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사소한 이유들을 가지고 고집 부리며 회유한다. 대부분은 설득의 탈을 쓴 지시이므로 지인이 원하는 방향대로 하게 되지만 나는 베이스가, 상대가 숨긴 자신만의 베네핏을 정황상 알아채게 되었을 때 반발감이 크게 들어 그렇게 해주기 싫어지는 좁은 그릇의 사람이다. 그러니까 차라리 처음부터 간결한 지시로 의사소통하지, 대체 왜
부끄러운 일이 떠오를 때마다 예외없이 육성으로 “왜그랬지”가 터져나온다. 인덕션을 거울을 변기를 닦다가 왜그랬지……. 최근엔 그와 유사한 빈도로 ‘왜저러지’ 생각했다. 왜저러지 왜저러지 왜저럴까……. 지인에게서 짚이는 구석이 있다.
지인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자유의지’라서 그럴 것이다. 주로 타인을 향해 남발되는 단어인데, ‘자유의지에 맡긴다, 너의 선택이다’ 등등으로 활용된다. 동시에 그는 자신 속에 채점표가 있다는 둥 자신에게 밉보인 사람에겐 어떻게 한다는 둥 다소 협박적인 말도 즐겨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모순이 발생한다. “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내가 은근히 바라는) 이것을 (알아서 잘) 하지 않으면 채점표에 선을 죽 그어 버리겠다.” 상대가 자신의 눈칠 보며 설설 기길 바라는 노골적인 언행이 아닌가. 전체를 두고 보자면, 오히려 상대를 ‘자유의지’ 없는 수동적인 존재로 상정하고 겁박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자유의지’는 빛좋은 개살구다.
이건 개중에도 아주 역하다고 생각하는 종류의 기만이다. 싫은 티를 내니 꽤 치사하게 복수하더라. 이 모습 또한 ‘담백하지 못함’의 증거가 아니겠나.
며칠이 지난 지금 지인과의 관계는 원만하다. 누그러진 마음으로 돌아보자면… 1. 탱탱한 젊음이 다시 한 번 홀리싓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나이 자체만으로 우선 갱생의 여지가 아주 열려 있음) 2. 그리고 내가 환갑 즈음 가지고 있을 캐릭터와 그 인간성이 아주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 무엇을 하여 그것에 익숙해진 사람임을 보인다는 점에서 환갑을 맞은 일반인들의 인간성은 승려들의 사리와도 비견되는 정수가 아닐까. 요즘 반면교사를 자주 접하게 되어서 두렵고 정신이 번쩍 든다. 기대보다도 걱정이 앞서는 건 나잇대에 따라 연상되는 이상적인 이미지 때문이란 걸 안다. 청년에게 도전성과 활동성이 연상되는 것처럼 내가 노인을 볼 적엔 ‘완숙함’이 연상되고, 그걸 멋대로 기대해 버린다. 그들은 시간이 지나다 보니 나이를 먹은 것 뿐일 수 있는데, 적어도 나이를 연세라 표현해야 할 것 같은 사람들에겐 또래 이상의 인간성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청년들이 공유하는 나름의 정신병과 오글거리는 치기가 있다면 장년층에게도 그들의 생애를 반영하는 교활함과 아집이 있을 수 있다고, 측은지심을 불러내 반감을 진정시키면 될 일이다. 근데도 내가 늙어서 그런 모습일 수 있다는 건 대체가 인정할 수가 없다!
+ ‘두 가지 해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솔직히 a는 틀린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관계에서 일관성 있게 담백하지 않은 사람은 어떤가. 누군가를 두고 ‘담백하지 않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본질적으로 진솔하지 않다 가식적이다와 가깝지, ‘나를 대하는 것과 쟤를 대하는 것이 다르다’이겠는가. 내 눈에 담백하지 않으면 담백하지 않은 거지, 쟤를 어떻게 대하는지 알 게 뭔가. a의 기준은 납득되지 않는다. 나 벌써 중년 남성 특유의 과도한 자기확신 길로 들어선 것 아닌가 스스로 의심되기도 한다. (안돼!!!@)
근황
난 요즘 아주 잘 지내고 있다. 오늘 레스토랑에서 같이 일하는 직원이 왜 이리 행복해 보이냐며 배아파 하기까지 했다.
사실 입꼬리만 올리고 있을 뿐이다. 무용 하던 시절에 이어 지금은 입꼬리 상승 2차 시기인 것 같다. 당시 한국무용 선생님은 눈물 쏙 빠지게 신랄한 분이셨고 한 순간이라도 무표정이거나 입꼬리가 내려가 있는 걸 보이면 크게 혼내셨다. 하루 세네시간 씩 입술에 경련이 올 정도로 미소짓던 반(semi)-아동학대의 사연이다.
지금은 혼내는 사람도 강제도 없지만 입꼬리 올리고 있는 게 처신에 유리하다는 걸 알고 웬만하면 웃고 지낸다. 생존본능이라는 게 단편적인 두려움보다 큰 추동인지, 이제 거의 90도로 치솟는 기세다. 가십과 마녀사냥 숨쉬듯 저지르는 무례. 내게 사회 경험이 많진 않다지만 여기서 본 사람들의 면면은 더 날것이라고 느낀다. 이제 그런 것들에 하나하나 진절머리 내지 않고 입꼬리 올린 채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그 주된 표적이 적어도 난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게 다 입꼬리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ㅋㅋ), 그걸 주제로 나중에 적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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